<< 본 게시글에는 바이오쇼크 1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게임의 첫 10분은 그 뒤 이어지는 10시간만큼이나 중요하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 그냥 제가 만들어 낸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꽤 사실에 가까운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첫 인상이 중요하듯이, 게임의 첫 인상은 게임 내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더구나 그 게임이 앵그리버드 같은 캐주얼한 게임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게임 속 세계에 몰입해야 하는 종류의 게임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게임도 그런 종류의 게임입니다.
그리고 이 게임은,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그야말로 "게임 도입부의 교과서" 같은 완벽한 도입부를 보여줍니다.
제가 소개할 게임은 바로 바이오쇼크 입니다.
사실 바이오쇼크는 도입부 뿐만 아니라 게임 전체적으로 뛰어난 퀄리티를 보여줍니다.
비디오 게임의 황금기라고도 할 수 있는 2007년에 포탈, 매스 이펙트, 위쳐, 커맨드 앤 컨쿼, 어쌔신 크리드, 헤일로3 등 쟁쟁한 경쟁작들을 꺽고 GOTY를 수상한 작품인 만큼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그런 게임의 도입부만을 다룬다는 것은 한편으로 아쉽기도 하지만, 바이오쇼크에 대한 훌륭한 분석글은 이미 인터넷에 많이 있기 때문에 저는 과감히 도입부 부분만을 집중해서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아래 영상을 먼저 보시고 블로그 글을 보시는 걸 권장드립니다
바쁘신 분들은 초반 5분 가량만이라도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사운드 디자인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소리를 꼭 키고 보세요!
게임의 도입부를 만드는 일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굉장히 많은 일들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입부에서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게임의 배경, 상황을 전달해야 하고,
게임의 기초적인 조작법을 숙지시켜야 하며,
게임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를 플레이어가 깨닫게 해야 합니다.
또한 서사적으로도 도입부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스토리가 있는 게임의 도입부에서는 작품의 계기가 되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거나, 작품의 주제를 꿰뚫는 내용들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도입부도 여전히 게임의 일부이기 때문에
도입부 또한 흥미롭고 재미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도입부가 재미가 없다면 플레이어의 게임에 대한 흥미가 처음부터 식어버릴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도입부는 어떠한 식으로든 플레이어의 흥미를 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이오쇼크는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해냈을까요?
함꼐 바이오쇼크의 오프닝을 살펴봅시다.



플레이어는 여객기 안의 좌석에서 게임을 시작합니다.
게임은 주인공의 가족 사진을 한 번 보여주고, 주인공이 가족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차례로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플레이어에게 주인공의 외형과 이름에 대한 정보를 전해줍니다.


그리고 곧이어 이어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비행기가 바다로 추락하는 소리,
화면은 검게 변하고, 게임의 로고가 화면에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다룬 부분이 게임의 첫 30초 정도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게임은 벌써 대략적인 게임의 배경, 주인공에 대한 정보, 그리고 게임의 제목을 플레이어에게 자연스럽게 노출시킴으로써 플레이어가 게임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플레이어는 바다 위로 번진 불길을 피해 자연스럽게 등대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등대 위로 올라온 플레이어는 반 정도 열려있는 황금색 문과 마주치게 됩니다.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문 안을 확인하러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문 안은 컴컴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쾅, 하고 큰 소리로 등 뒤의 문이 닫힙니다.
그리고 곧이어 들리는 조명이 켜지는 크고 강렬한 소리.
이러한 소리들은 제작진의 의도적으로 플레이어를 놀래키고 긴장감을 심어주고자 추가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건 거대한 황금빛 동상일 뿐, 다행히 위협이 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곧이어 흘러나오는 잔잔한 노랫소리는 플레이어를 다시 안심시킵니다.
게임은 이러한 사소한 부분에서 게임은 플레이어를 긴장시켰다가, 안심시켰다가 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비행기가 추락하며 플레이어를 긴장시키지만
플레이어를 등대로 이동시킴으로서 안심시키고,
등대에 들어간 플레이어를 문이 닫히는 소리와 큰 조명 소리로 긴장시키지만,
조명이 켜지고 흘러나오는 잔잔한 노랫소리로 플레이어를 다시 안심시킵니다.
이러한 긴장과 이완의 반복은 영화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기법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매체에 더 깊은 감정적 몰입을 할 수 있는 역할을 해 줍니다.



등대 안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플레이어는 이 구형 잠수함과 마주하게 됩니다.잠수함의 문은 열려있고,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잠수함 안에 탑승합니다.
잠수함 가운데의 레버를 당기면 플레이어는 깊은 바닷속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잠수함을 타고 어느 정도 내려가다 보면,
게임은 잠수함 내의 스크린을 통해 바닷속 도시 랩쳐의 설립자인 앤드류 라이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플레이어는 앤드류 라이언이 어떠한 사상을 지닌 사람인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음악은 점점 고조되고,잠수함의 창문을 가로막던 스크린도 내려갑니다.
그리고 앤드류 라이언의 대사와 함께 해저도시 랩쳐의 모습이 스크린에 펼쳐집니다.


랩쳐(수중 도시)를 소개하기까지의 이 일련의 과정들은 정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이오쇼크는 단순히 랩처를 시각적으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랩처로 향하는 여정을 일종의 짧은 영화와 같은 형태로 그려내어 플레이어가 더 게임 속 세계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OST를 비롯한 사운드 디자인 전반은 바이오쇼크 작품 전반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현대의 트리플A 게임들은 바이오쇼크보다 더 뛰어난 그래픽을 보여줄지는 몰라도, 바이오쇼크 만한 임팩트를 주는 오프닝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Immersive-Sim" 게임 장르 자체의 쇠퇴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기회가 된다면 다른 포스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각설하고, 다시 바이오쇼크의 오프닝을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주인공이 탄 잠수함은 어떤 건물 안으로 들어갑니다. 건물로 향하는 동안 게임에서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지만, 게임은 이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잠수함은 건물 수로를 따라 올라가 정박하게 됩니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마주치는 것은 찬란한 도시의 바깥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플레이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가 다른 인간을 공격해 살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생명체는 잠수함 위로 올라가 잠수함 갑판을 뜯어 플레이어를 공격하려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갑판에 흐르고 있는 전기 때문에 이 괴생명체는 공격을 포기하고 도망칩니다.
이 장면은 사실 노골적으로 플레이어에게 정보를 알려주지는 않지만, 이 괴생명체가 전기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넌지시 전해줍니다. 바이오쇼크는 이처럼 플레이어에게 직접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보다, 플레이어 스스로가 게임의 구조를 깨달아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이는 오프닝 뿐만 아니라 게임 전반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또한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큰 의문을 던짐으로써 플레이어의 흥미를 유발합니다.
바로 "왜 랩쳐는 이렇게 폐허가 되었을까?" 라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진행됩니다.
플레이어는 잠수함 내에 달려있던 무전기를 통해 아틀라스(Atlas) 라는 인물과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아까 건물을 들어오면서 났던 목소리도 이 아틀라스라는 인물의 목소리였던 것이죠.
아틀라스는 플레이어를 그 곳에서 탈출시켜줄 테니 자신을 믿으라는 말을 합니다.
<< 중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
게임을 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아틀라스는 주인공을 이용하는 게임의 주요 악역입니다. 물론 아틀라스와 앤드류 라이언 중 누가 "진짜" 악역이냐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의 차이가 있겠지만, 어찌되었던 주인공을 속이고 이용한다는 것은 여전합니다.
게임은 아틀라스를 자연스럽게 게임 시스템의 일부인 것처럼 포장해 플레이어를 속입니다.
이렇게 플레이어를 속이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인트로입니다. 인트로에서 플레이어는 아틀라스의 도움을 받고, 아틀라스의 지시를 따라 행동합니다. 만약 아틀라스가 인트로가 다 끝난 이후에야 등장했다면 아틀라스의 진의에 대해 의심을 품는 플레이어들도 분명 생겨났을 겁니다. 하지만 아틀라스는 인트로에 등장했고, 그동안 다른 수많은 게임들에서 "튜토리얼을 도와주는 조력자"의 존재를 수없이 많이 접한 플레이어들은 자연스럽게 아틀라스도 그러한 "조력자"일 것이라고 추측했고, 이는 결국 게임의 반전을 숨기는 데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건물의 길을 따라 이동하던 플레이어는 아까 만났던 괴생명체와 다시 마주하게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틀라스가 전투용 드론을 보내 플레이어를 도와줍니다.
이 사소해보이는 장면에는 몇 가지 주목할 점들이 있습니다.
우선 빛을 사용해 플레이어의 시야를 이동시켜 주의를 끌었다는 부분을 주목해볼 수 있습니다.
바이오쇼크의 디렉터 켄 레빈은 과거 무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데, 이러한 그의 경험은 바이오쇼크를 연출할 때 방향이 있는 빛(Directional Light)을 훌륭하게 활용하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게임을 하다 보면 빛을 활용한 훌륭한 연출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저 괴생명체가 "벽을 오를 수 있다"는 정보와, "드론은 총을 쏠 수 있다"는 정보를 은연중에 보여준 것입니다.
단순히 무전기로 "저 괴생명체들은 벽을 오를 수 있으니 조심하는게 좋아"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직접 보여주는 것으로써 바이오쇼크는 플레이어가 자연스럽게 정보를 배울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게임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해 플레이어에게 정보를 전해줍니다. 렌치를 줍고, 벽을 부수고, 몸을 숙여 구멍을 지나가는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기초적인 조작법들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습니다.
또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불타는 소파를 점프해서 지나가 괴생명체와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점프, 전투를 하는 법을 알려주고 불타는 지형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합니다.


전투가 끝난 플레이어는 뒤에서 들리는 광고 소리와 현란한 네온사인이 가리키는 방향에 이끌려 윗 층의 플라스미드 자판기에 도착합니다. 바이오쇼크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플레이어의 진행방향을 유도함으로서 게임이 부자연스럽지 않게 이야기를 전개해나갈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플라스미드를 몸에 이식하는 과정에서 계단 아래로 떨어진 주인공은 정신을 잃고 맙니다.
정신을 잃은 주인공 앞에는 주인공에게로부터 "아담"을 빼앗으려고 나타는 두 명의 변이된 인간이 나타납니다.
게임은 변이된 인간의 대사("Wonder if he still got some Adam") 를 통해 아담이라는 물건이 랩처에서는 굉장히 가치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이들은 곧이어 나타나는 "빅 대디"를 피해 도망치게 되고, 플레이어는 처음으로 "빅 대디"의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짧은 장면을 통해 플레이어는 어떤 캐릭터들이 앞으로 적으로 나타날 지에 대한 정보를 익히게 되고, 랩쳐에 대한 지식도 익히게 됩니다. 또한 빅 대디는 굉장히 강력한 적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것도 은연 중에 보여줍니다.

정신을 차린 주인공의 손에는 파란 색 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플레이어는 화면을 통해 자연스럽게 아까 사용한 플라스미드로 인해 전기를 쏘는 능력을 얻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눈치가 빠른 플레이어라면 여기까지 오면서 보았던 플라스미드 광고(잠수함에서 본 불을 쏘는 플라스미드와 염력 플라스미드)를 통해, 다른 능력을 쓸 수 있는 플라스미드들도 존재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정신을 차린 플레이어의 시야 바로 앞에는 치직거리면서 작동을 멈춘 문의 스위치가 있습니다.
게임은 자연스럽게 플레이어가 이곳에 전기를 쏘는 것을 유도하고, 전기를 쏘면 문이 열리며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지금까지 제가 다룬 내용이 바이오쇼크의 첫 10분간의 내용입니다.
10분간의 오프닝을 보시면서, 바이오쇼크의 게임 디자인에 나타나는 하나의 공통된 규칙을 찾으셨을 겁니다.
바로 "플레이어 스스로 깨닫게 유도하는 것" 입니다.
바이오쇼크가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부분들 때문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게임들은 게임의 인트로 부분에서 플레이어를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학습시켰습니다. 이는 플레이어의 몰입감을 방해하고, 심한 경우에는 플레이어를 바보 취급하는 듯한 느낌을 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이오쇼크는 플레이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시각, 청각 모두를 활용해 여러 장치들을 마련해놓았고, 이는 플레이어가 랩쳐의 아름답지만 공포스러운 풍경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바이오쇼크의 이러한 부분들은 현대의 많은 게임들이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글도 기대해주세요!
'게임 연구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게임엔 '힙스터'들도 필요하다 - 게임은 대중적이어야 하는가? (1) | 2021.08.06 |
---|---|
5. FPS는 죽었다 - 아레나 FPS로 알아보는 FPS 패러다임의 변화 (1) | 2021.06.20 |
4. 게임 속에 이야기를 녹여내는 방법 - 선택과 결과 (0) | 2021.02.25 |
3. COVIDeo game - 2020년 게임 트랜드 분석 (0) | 2020.12.26 |
1. 무엇이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가 - 로그라이크(Rouge-like) (2) | 2020.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