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군대에서의 1년 6개월이 지나갔다.
지난 1년 6개월간은 정말 다이나믹했다. 분명 육군 전체에서도 꽤 유니크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군대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털어놓는 것도 재미는 있겠지만, 그런 건 친구들과의 안줏거리 정도로 만족한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지난 1년 6개월간 내가 무엇을 배웠고,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갈 것인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1년 반, 무얼 얻었나?
군생활을 하면서 우스갯소리로 "군대에서 얻을 건 없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지만, 돌이켜보면 얻은 게 없지는 않다.
군대는 체력적으로 더 강해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입대 전에도 맨몸운동 정도는 꾸준히 했지만, 입대 후 규칙적인 생활 패턴 속에서 생활하며 더 체계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가 성장하는 걸 보며 얻는 성취감도 있었고, 다양한 운동 기구들을 접하며 운동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무엇보다 체력이 더 좋아지면서 두뇌 회전이 전보다도 더 빨라진 것 같은 느낌(착각일지도 모르지만)도 든다.
또 군대는 일종의 사회생활 체험판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사회보다 훨씬 수직적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어려운 곳인 만큼, 어떤 면에선 사회 이상으로 극단적인 일들을 겪을 수 있는 곳인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군대에서 겪은 온갖 일들은 앞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겪을 일들에 대한 약간의 면역을 길러주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군대에서는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잘 몰랐던 관심사들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고,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힐 수도 있었다.
또 위계질서에 따라야 하는 군 조직 특성 상, 내가 상급자에게 해야 하는 행동들부터 반대로 상급자의 입장이 되어 내가 맡아야 하는 역할과 책임들에 대한 것들까지, 한 계급씩 진급해나가며 배울 수 있었다.
사실 이것들은 군대가 내게 직접 제공해주었다기보단, 내가 군대라는 환경 속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은 것들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군대라는 환경이 있었기에 이러한 것들을 보다 더 쉽게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 생각해보니 군대가 직접 해준 것도 있다. 월급이다. 예전보다 병사 월급이 많이 오르기도 했고 금리가 하늘을 찌르는 시대인만큼, 차곡차곡 모으니 전역할 때 생각보다 많은 액수를 모을 수 있었다. 힘들기 모은 만큼, 쓰더라도 신중히 쓸 생각이다. 또 1년에 한 번씩 총 두 번 지원받은 자기계발비도 쏠쏠했다. 책하고 운동기구 사는데 보태서 사용했다.
사실 이런 것들 이상으로, 복무기간동안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지적 성장이다. 상병 1호봉때 쓴 글에서도 말했었듯이, 난 지식의 측면에서 많은 성장을 이뤄내었다. 뿐만 아니라 통찰력의 측면에서도 지난 1년 6개월간 많은 변화와 성장이 있었다고 느낀다.
적어놓고 보니 생각보다 얻은 것들이 꽤 된다. 얻은 것들에 물론 감사하지만, 이것들에 안주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이제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이다
복무 중에 남은 복무기간을 보며 항상 하던 생각이 있다. 남은 D-day는 내 군생활이 끝나기까지의 디데이가 아니라, 내 미래가 시작되기까지의 디데이라는 생각이다.
좀 오글거리긴 하는데, 진짜 그렇게 생각했다.
군대에서 난 미래만을 보고 살았고, 전역은 내게 도착선이 아닌 출발선이었다.
그 출발선에 선 지금, 정말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여행
거창한 도입부에 비해 위시리스트 첫 번째 항목부터 뻔한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역 후 떠나는 여행만큼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어딜 가냐, 가서 뭘 하냐 같은 건 블로그에 적기에는 좀 프라이빗한 내용이라 굳이 적진 않지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건 새로운 시도들을 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젊은 나이일 때만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고, 여행을 통해 접하는 새로운 환경에 나를 내던져보고 싶다. 여유롭게 풍경을 바라보며 거니는 것도 좋지만, 이번 여행은 힐링보다는 챌린지들로 채워보고 싶다. 그리고 이 과정들을 브이로그나 영상 콘텐츠로 만들어볼 생각이다. 기획, 촬영하고 만드는 과정 전부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
확실히 군생활 중 본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영화 정도로 고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창작과 개발
드디어 컴퓨터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다.
무언가를 창작하는게 가장 큰 즐거움인 내게, 전자기기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함으로써 창작의 자유가 제한당하는 환경은 분명 가혹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오히려 더 값어치있는 창작을 하기 위한 기반을 다질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지난 1년 반 동안 꾸준히, 개발이니 게임디자인이니 알고리즘이니 할 것 없이 고민하고 공부했다는 것은 내 깃헙과 블로그의 기록들, 나를 지켜본 내 군 동기들, 그리고 날 응원해준 친구들이 증명해줄 것이다.
이제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된 만큼, 창작의 범주 내에서도 특히 개발과 관련되어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아직 깔짝거린 수준이긴 하지만 웹과 머신러닝 프로젝트도 제대로 만들어보며 조금 더 깊게 파고 들어가보고 싶다.
또 비교적 후순위인 것들로는 알고리즘을 조금 더 공부해 알고리즘 경시대회에 참여해본다거나, 오픈소스 활동에 기여해보는 것들도 있다.
개발 분야중에서도 가장 관심있는 게임분야에 관련해서는 할 얘기가 너무 많은데, 여기서는 간단히만 적어보겠다.
게임은 만들때도 즐겁지만 누군가가 내 게임을 해주는 것을 볼 때 더 즐거운데, 사실 그동안 제대로 대중들에게 내놓을 목적으로 개발한 게임이 없었다. 마켓에 무료로 공개한 게임이 두 개 있기는 하지만, 하나는 협업 경험에 초점을 둔 단기 프로젝트였고, 또 하나는 프로그래밍을 막 접한 시점에 뭣모르고 만들고 싶은 걸 마구 만들다보니 나온 게임이었다.
게다가 그동안 만든 게임들은 블로그에 올려둔 글 외에는 게임 홍보도 없었기에 대중의 피드백이 없다시피했다. 게임 자체도 개발 목적이 상업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중성이나 게임성 중 어느 한 쪽이 부족하거나, 혹은 기술적 한계로 아쉬움이 남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2021년의 나보다 게임 디자인이나 게임 개발의 측면 모두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 즉 게임을 만들 준비는 갖추어져있다. 또 군대를 갓 전역한 지금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도 있다. 바로 지금이 '게임다운 게임'을 만들 기 최적의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발하는 데에는 많은 시행착오도 겪을 것이고, 복학 이후부턴 게임 개발에 투자할 시간도 줄겠지만, 최소한 개발을 시작하기에 지금보다 적기인 때는 찾기 어려울 것 같다.
이렇게 대중을 위한 게임도 만들고 싶지만 이것과 별도로 만들고 싶은 게임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기술 역량을 기르기 위한 게임, 즉 개발자로서의 역량을 기를 수 있는 게임이다.
'좋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술적 역량은 무조건 높지만은 않다. 하지만 '좋은 개발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술적 능력을 갈고 닦아야 한다. 기술적으로 복잡하고 방대한 프로젝트를 개발하면서 얻는 희열은 재밌고 뛰어난 작품성의 게임을 만들때와는 또 다른 창작의 즐거움이기에, 나는 어느 것도 놓치지 않고 둘을 병행하고 싶다. 특히 게임 서버 개발과 그래픽스와 관련해 배운 내용들을 직접 창작에 적용시켜보면서 개발 역량을 기르고 싶다.
적다보니 양이 꽤 길어졌는데, 아무튼 개발 이야기는 이 정도로만 하자. 개발 외적으로도 만들고 싶은 것들이 많다.
싸구려 미디로 만들던 작곡도 조금 더 제대로 된 소프트웨어로 화성학도 공부해서 다시 제대로 해보고 싶고,
일러스트나 3D 모델링에도 관심이 가고,
간단한 영상 편집을 배워 영상 콘텐츠 제작에도 참여해보고 싶다.
만화 제작, 책 집필, 등등, 해보고 싶은 것들이 아주 많다.
이렇게 나열해놓고 보니 충동적으로 하고싶은 것들을 막 적어둔 것 같은데, 대부분 예전에 해왔던 것들이거나 군생활 동안 하려고 계획했던 것들이다.
뭔가를 하면 제대로 해내려는 성향이 있고, 특히 창작에 관해선 더 그런 기질이 강한 만큼, 전역 후 오히려 더 바빠질 것 같은 즐거운 불안감이 든다.
운동
군대에서 운동을 더 열심히 했다고 해서 막 고중량을 들고 벌크업하고 하면서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체중이 3키로 정도 늘긴 했지만, 3대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고, 맨몸운동만 하던 기존의 루틴에서 맨몸운동하고 머신 + 덤벨류 운동을 병행하는 정도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래도 운동에 재미를 붙이게 된 건 맞다. 입대전 친구 한 명이 군대가서 운동 열심히 하라고 근육몬 이모티콘을 선물해줬는데, 아마 그 친구도 내가 진짜 운동에 재미를 붙일 줄은 몰랐을 것 같다. 나도 몰랐으니깐 말이다.
운동에 재미를 붙이게 된 계기는 운동이 얼마나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되는가를 깨닫게 되고 나서부터였다. 꼭 우락부락한 몸을 만드는게 목적이 아니더라도 운동을 하니까 자리에 앉아서 집중할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났고, 두뇌회전도 더 빨라진 갓 같다. 또 극적인 변화는 아닐지언정 조금씩 좋아지는 몸을 보면, 나라는 캐릭터를 레벨업 시키는듯한 묘한 성취감도 느낕 수 있었다.
이미 전역 전에 집에서 쓸 수 있는 운동기구들을 사 놓았고, 그 기구들 중심으로 집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해볼 생각이다. 헬스장을 끊어서 제대로 웨이트를 시작해볼까도 생각하고 있는데, 이건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다.
사실 여기 적은 것들 말고도 나의 TODO리스트는 훨씬 더 길다.
군생활 하는 동안 생각날 때마다 적어놓은 리스트가 있는데, 거기 있는 것들을 전부 다 적긴 힘들 것 같다.
뭐 아무튼,
1년 반 고생 많았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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